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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카가 제안하는 새로운 생각

쿼카와 함께 읽는 책 002. 사랑할까, 먹을까

사랑할까, 먹을까

(황윤, 휴, 2018)

 


 

우연한 기회로 영화를 한 편 봤었다.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감상을 말하자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답시고 설치며 살아서 쓰레기를 배출하고 식품을 섭취하며 똥이나 싸대는 것보다, 차라리 한명의 인간이라도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지구 위의 생명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싶을만큼.

 

아무튼 죽지 않고 아직까진 살아있다. 살아있으려면 그 값을 해야한다는 부채감은 이 책을 읽으며 생겼다. 20살, 채식을 시작할 때 이미 이 세계의 고통을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에도 공부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에 대해선 차마 보지 못했어도 들어는 봤어! 할 정도였는데,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애송이였음을...

 

이 책은 그 영화를 요약 정리한 책이다. 황윤 작가는 실제로도 뵌 적이 있다.(물론 사적으로 말고 공적인 담론의 장에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아이의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고려하고 걱정하고 생각해야 할 테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채식에서 멀어지지만, 도리어 가까워지는 경우도 많다. 둘 다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후자가 더 넓고 더 아이의 미래까지도 고려한 사랑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황윤 감독은 나에게 아주 큰 사랑을 아는 엄마로 기억된다.

 


 

 

47p

성녀와 인간 엄마와 돼지 엄마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의 힘, 사랑의 힘이다. 모든 탄생의 순간은 경이롭다. 온 우주가 도와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순간.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하며, 동등하다. 누구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점에서. 고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108p

흑인이 백인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 것처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 것처럼, 동물도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앨리스 워커)

 

119p

온통 육류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음식들은 정말 우리의 선택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강요하는 선택인가? 공장식 ᅟᅮᆨ산이 아닌 농장에서 인도적으로 기른 동물을 먹을 권리는 주어지는가? 또 동물을 먹지 않을 권리는 존중되는가? 다른 것을 먹을 선택권은 주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돼지들이 돼지답게 살 권리는 존중되는가? 인간의 욕망을 위해 고기 생산 기계로 취급받는 것에 돼지들은 동의했는가?

 

231p

무엇을 먹느냐는 오랜 세월 권력의 문제였고 또한 취향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윤리와 정의의 문제가 되었고, 이제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덜 키우고, 덜 먹고, 생명을 생명으로 대우하는 일. 개인의 변화는 물론 법과 제도의 변화로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이 책을 다보고, 락토오보 베지테리안인 나는 행복한 달걀을 찾아 경북 봉화로 갔다. 거기서 물론 갇혀있긴 하지만 건강하게 닭처럼 살고 있는 닭들을 마주했고 달걀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한 알당 600원이었고 당시 백수였던 나에겐 너무나... 너무나... 힘겨운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생명답게 여길 수 있는 윤리를 갖춘 인간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타자로부터 생명다운, 인간다운 존재로 여겨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살아오며 여성이고 아이였고 학생이었고 알바생이었고 노동자이(였)던 나는, 약자를 짓누르고 도구로서 이용코자 하는 수많은 도전에 맞서 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이게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나는 공부하는 기계나 말 잘듣는 기계나 예쁘게 꾸미는 기계나 노동하여 결과를 생산하는 기계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돼지가 고기기계가 되고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고 가치있다고 느낄수록, 타자의 것은 더욱더 그러했다. 그렇게 배우고 느껴왔으면서 고기를 계속 먹을 순 없었다.

 

우리는 타자를 대하는 수많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그중 나를 높이려는 어떤 지나친 시도들은 되려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진짜 없어보이게 만들곤 한다. 대부분의 이기적인 시도들이, 문학과 영화와 미디어에 수없이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듯, 자기의 자존감마저 파괴한다.(그들은 보통 자존감과 자존심을 헷갈려한다) 진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타자를 가치있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타적이고 배려있고 겸손하고 사냥한 사람이 가장 뛰어나고 오래도록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