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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카가 제안하는 새로운 생각

쿼카와 함께 읽는 책 005. 위장환경주의

『위장환경주의

(카트린 하르트만, 이미옥 옮김, 에코리브르, 2018)

 


 

22p

만약 네스프레소를 처음부터 시장에 출시하지 않았다면,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듯 지속적으로 발전한 소비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질문을 아예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요컨대 그와 같은 우려를 반박하려 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쓰레기를 배출하고, 지나치게 비싼 커피 시스템이 자원을 낭비하고 소농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커피 시스템은 생태적 고려를 외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후에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33p

시민들은 자신의 경제적 역할을 '소비자'에서 찾은 것 같다. 즉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윤리적 소비'로 자신의 역할을 대체하며 여전히 명랑하게 소비 생활을 하고 있다.

 

39p

"일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개인에게 강제로 공범이 되게끔 만든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한다. 노예 관계와 착취 조건을 바꾸려면 시스템에 집단적 반기를 들 필요가 있고, 집단적 반기를 들 수 있으려면 또한 서구사회의 삶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바꿔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대신 "집단적으로 의미를 위회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다시 말해, 서구식 삶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바꾸지는 않으면서 "쾌적함, 불편함, 무사안일, 지나친 요구, 무심함과 공포 같은 것이 마구 혼합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라는 이론으로 무장한다는 것이다.

 

88p

재난은 수익을 고려해 안전 대비책을 깡그리 무시한 파렴치한 대기업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위험을 앞에 두고도 눈을 감아버린 무분별한 정부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기술에 대한 위험하고도 순진한 믿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환상의 역사일 수도 있다. 규제 철폐, 부패와 로비, 대기업의 권력, 그리고 정치권의 관리 부재의 역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채우기 어려운 욕구, 이를테면 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욕구로 인해 빚어진 드라마틱한 역사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나치게 풍요로운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이 내미는 녹색의 약속을 믿고 있다.

 

162p

요컨대 노동자와 농부가 그렇듯 인정사정없이 착취당하지 않는다면, 종려유는 세상에서 가장 싸지도 않고 갈망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202p

정치는 기업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태와 사회적 평등에 적합한 경제를 강요해야 하는 자신의 과제를 다시금 벗어던진다. 그대신 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소비자는 앞으로 소비하기 전에 정보를 얻고(자발적으로!) 생태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기업의 말을 기준으로 계속 소비하면 된다는 것이다.

 

239p

기업에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압박할 수 있는 법적인 규칙? 어림없다! 독일 기업은 법적으로 유엔 기본 노선을 유지할 의무조차 없다. 또한 독일 정부는 기업이 그와 같은 의무를 무시하더라도 공공기관의 주문, 공적 자금 지급, 대외 무역 진흥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독일 정부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법원에 고소할 기회조차 막을 계획이었다. 이로써 남반구 사람들은 인권 침해에 과연한 독일 회사에 책임을 묻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행동 계획에 분명하게 적시한 것은 '기대'한다는 것뿐이다.

 

296p

인간은 다른 조건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경제 시스템에 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린 이걸 허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이 시스템을 지배해야 합니다.

 

333p

"좋은 삶을 사는 형태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요. 여기서 중요한 과제는 개별적인 현실과 지역에 맞는, 물론 공통된 기본 원칙에서 나온 자체적인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데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조화와 공평함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라는 기본 원칙이 그것입니다."

 

335p

만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균형을 맞춰야 한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린 워싱'은 소비자일 때도 나를 어렵게 하는 문제였지만, 가게를 차리고 '환경'이라는 키워드를 건 채 장사를 하려고보니 훨씬 더 심각하게 나를 고민스럽게 하는 존재다. 사실 모든 생산과 소비, 폐기에서 환경적이라는 말은 부당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부분에서 환경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도가 덜 하다고 해서, 얼마간의 노력을 했다고 해서 그걸 "친환경적"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물론 나름의 항변은 있다. 위생이나 의료, 교육 등 생존이나 인간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과 소비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일 지 모른다. 우리는 양치도 해야하고, 세탁도 해야하고, 설거지도 하고 옷도 입긴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필수적인 영역인지가 문제가 된다. 세탁을 하고 말리는 기간까지 생각하면 옷이 한 벌만 필요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해서 옷이 수십벌이나 필요한 것 또한 아니다. 그럼 어디까지를 규정하고 제한해야 할까? 양치를 할 때 칫솔모가 플라스틱인 부분은 현재까지로서는 치아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하는데, 그럼 칫솔대를 나무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할까? 실크로 만든 치실은? 치실은 필수적인 품목인가? 샴푸는? 린스는? 바디워시는? 세안제는? 모든 영역에서 내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어 버린다. 물건 하나를 들여오려고 해도 고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그나마 덜 환경파괴적인 물품을 선택했다고 해서 고민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인 나는 버터 대신 마가린을 먹는데, 마가린에는 이 책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종려유가 들어간다. 종려유는 식용유, 비누 등 생활 속 필수적인 물품들에 거의 포함되어 있다. 종려유 생산을 위해 숲을 불지르고, 다른 농업 생산이 중단되지만 이것은 식물성 원료이고, 숲에서 나온 원료이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들에게도, 환경주의자들에게도, 값싼 까닭에 산업시장에서도 환영받는다. 하지만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다른 농업을 희생시키고 지역의 노동을 후려치지 않으면 절대 그 가격에 가능하지 않은 생산물이다. 녹색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갈아넣고 있는지도 역시 따져보아야 할 부분이다.

 

저자는 독일의 예시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에서는 그럼 어떤 규제와 법조항들이 생산자들을 덜 환경파괴적인 활동으로 이끌고 소비자에게 적절한 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환경부는 냉정하게 말해서 부서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느낌이다. 정책을 연구하고 수립하고 제안하고 실제로 압박하여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고, 더불어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도록 이끄는 게 정부부처의 역할인데, 솔직히 약간 자기의 역할이 캠페이너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장관은 동남권 신공항 찬성했던데, 진짜 너무 짜증난다. 그냥 정치인인거겠지 무슨 환경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 장관까지 하고 있는 건지 너무 열받아서 문장이 제대로 안써질 지경이다.

 

도대체 공적인 영역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슈퍼마켓에 가면 친환경인증로고가 붙여진 생산품들이 빼곡하다. 공적인 영역에서 환경적인 것과 아닌것을 나눠서 로고만 붙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로고 붙은 건 더 비싸게 팔아먹고? 그래서 친환경적 소비와 환경운동은 돈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는 잘못된 편견만 만들어내는 게? 계란만 해도 그렇다. 친환경인증 계란이 왜 필요하지?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닭을 애초에 허용치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런 역할은 모두 버려놓고, 자기는 인증만 한다고? 그래서 선택은 소비자가 하고. 그래서 윤리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드는 것도, 고착시키는 것도, 심화시키는 것도 모두 개인 소비자가 선택한 일이라고?

 

개인의 역할 또한 애매하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가진 정치적 역량과 영향력, 가능성을 모두 포기한 것 같다. 그냥 소비자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고, 소비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코자 한다. 그럴수록 위장환경주의는 극심해질 뿐이다. 멀쩡히 페트병으로 리사이클링할 수 있었던 플레이크가 뜬금없이 섬유가 되어 옷의 강을 이루게 된다든지, 땅 아래 묻혔을 때 60도 이상의 온도에서만 생분해되는 비닐들이 멀쩡히 '친환경' 상표를 달고 출시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적 권리과 의무는 어디에 내던져졌단 말인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모두 '돈을 쓰는 것'으로 치환되는 게 너무 빡이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세계를 바꾸지 않으면, 그냥 플라스틱 좀 덜쓰고 장바구니 조금 들고다니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기에 상황에 놓인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나 성장해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는 물론 엄청난 어려움이 있겠지만 나는 예전에 근무하던 단체에 있을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강하지 않아 당시 학생운동 및 시민운동의 중대한 사유에서 경제적인 이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뭐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알 수 없고,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인한 단점들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돈이 먼저가 아닌 사람들이 대다수인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가능하다는 것.

 

지금은 그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우리는 발전하며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세상을 진짜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무수한 기술과 아이디어, 용기를 갖고 있고 지금까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요구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싸워서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