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쿼카가 제안하는 새로운 생각

쿼카와 함께 읽는 책 007. 비거닝

『비거닝

(이라영 외, 동녘, 2020)

 


 

23p

나는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해야 하나 고민한다. 이처럼 적당히 넘겨버리고 다시 시도했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마주하고 의기소침해졌다가 다시 의욕적으로 내 삶을 실험하기를 반복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인간은 원래, 자연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래도 된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계속 시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30p

지구의 약 870만 종 중에서 단 한 종을 멱여살리는 데 써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도시나 도로 등 그 한 종을 위한 인프라의 면적은 아직 포함되지도 않는다. 식량 생산을 위해 지구가 통째로 이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90%의 어장이 남획된 바다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은 상태이다.

 

46p

비건은 무언가 특별하고 건강하고 맛이 없다는 편견이 있다. 이건 육식과 자본주의가 '고기'는 무조건 맛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고 익숙한 느낌이기도 하다.

 

52p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나의 생애 동안 다 쓰지도 못할 많은 감정과 물건들을 늘리다 백 년도 못살고 무책임하게 세상을 떠날 테지. 쓰레기만 두고 사라지기엔 지구라는 곳에서 내가 받은 것이 참 많다. 플라스틱 사용과 일회용품을 줄이고 나 때문에 죽는 생물이 최소한이었으면 좋겠다. 낭비만 가득한 인생이 되고 싶진 않다.

 

62p

미래 세대가 지금 우리의 시대를 되돌아본다면 무엇을 가장 충격적으로 여길까? 우리는 노예제도, 여성 차별, 합법적 고문, 이단의 처형, 정벌과 학살, 제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발생 등을 돌아보며 어떻게 당시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고 경악하지 않았을까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후손이 끔찍이 여길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광기의 극치는 과연 무엇일까?

 

89p

어떤 관행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관행을 뒤집어 볼 생각을 하기가 좀처럼 힘들다. 심지어 그렇게 할 경우에는 뭔가 도덕적인 잘못을 범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95p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동물들은 태어나서부터 식탁에 오르기까지 단 하루도 괴로움을 겪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141p

현재의 '비건' 운동이 '자연식물식' 운동으로 진화하길 바란다. '자연식물식'은 자연 상태의 식물성 식품을 중심으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동물성 식품을 배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식물성 기름과 설탕, 고도로 가공된 식물 식품 또한 최대한 배제하는 식단이다.

 

147p

도축하기 전 기도를 올리고,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빠르게 도축하는 것은 무슬림 율법에 따른 행위다.

 

159p

채식은 나은 선택지를 가진 이들의 고귀한 윤리적 액세서리가 아니다. 나는 채식이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이고, 파편화된 관계를 연결시키며,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하고, 지구를 살리는 거대한 협업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채식은 우리 현실의 변혁을 추동하는 사회운동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께 채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지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


 

사실 이 책을 읽는 게 몹시 힘들었다. 다양한 저자가 참여한 책이기 때문에 각자는 한 마디씩을 해도 겹치는 이야기를 책 읽는 내내 듣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완벽한 비건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생각 말어라' 하는 류의 설교가 그러했다. 대부분의 저자가 자신이 완벽한 비건이 아님을 고백하며 이런 채식도 받아들이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이 책이 비건을 시작하려는, 채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런 조언은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될 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나는 채식주의를 시작한지 10년 정도 되었고(그 사이에 잠깐 쉰 적이 있긴 하지만!) 저런 류의 잔소리가 귀에 못이 박힌 지경이라 견디기가 좀 어려웠다.

 

나 역시 비건은 아니다. 채식을 시작한 이후 6년 정도는 페스코였고, 3년 정도를 락토오보로 보내고 있다. 우유나 버터, 치즈, 계란이 생산되는 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비건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비건을 하라고, 완벽한 채식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사실을 뻔뻔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내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석유와 화학에 기초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90년대에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사회인 쿼카는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끝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타협을 거쳐야만 한다. 어디까지를 양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고 해도, 어쨌든 지금과 같은 삶의 양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각자의 삶에서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해본다면, 분명 그 다음에는 더 나은 도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채식을 권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동물권 때문에, 어떤 사람은 기후위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종교 때문에, 누군가는 영양과 건강, 미용 때문에 채식을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채식을 우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채식을 하는 중에는 다른 채식의 이점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훨씬 수용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나는 유튜브에서 축산업의 열악하고 비위생적, 비생명적 환경에 충격을 받고 채식을 시작했다. 그전에 돼지나 소를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고, 개 한 마리 키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이 고통인지, 무엇이 윤리인지 알기 때문에 이 상황을 멈추기 위해서는 채식밖에 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후 육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문제, 종교적인 깨달음, 기후에 미치는 영향 등 모든 부분에서 채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런 문제를 훨씬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사고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보통 이해보다 행동이 느린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채식주의자로서 잘못 살아온 부분도 고백하려 한다. 첫째, 나는 정크채식을 너무 즐겼다. 콩고기, 튀긴 거, 밀가루 등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찾아 즐기며, 채식도 그리 나쁘지 않음을 전파하려 애썼다. 물론 살도 찌고, 피부 나빠지고 건강을 해치고 삶을 악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채식을 한다는 게 곧 건강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건강과 미용을 위해 채식하고자 하는 이들을 설득하고, 또 채식하는 사람들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자연식물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발전시키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식물식을 할 경우, 발생하는 쓰레기와 탄소발자국도 매우 적어진다. 인간이 자연에게 가까워지는 모든 시도가 거의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채식할 수 없는 인간들을 내멋대로 단정지어온 것이다. 나는 솔직히 고백컨대 매우 호전적인 인간으로, 옛날부터 선생님을 비롯해 동아리원까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과 개처럼 싸워댔다.(모든 댕댕이에게 사과를!) 나이가 좀 들어서는 진짜 너무 힘들고 피곤했기 때문에 그냥 그런 말하는 인간들을 설득하고 싸우는 대신 무시하고 관계를 거부하며 내 입맛에 맞는 인간관계를 만들어왔다. 그 덕에 나는 매우 쾌적한 인생을 살고는 있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생산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는 걸 잘 안다. 특히 이번에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촌오빠가 그저 돈을 잘 벌기 위해 샐러드 가게를 열었는데(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되고, 이틈을 이용해 채식에 대해 오빠와 진지하게 의논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내가 먼저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반성, 뼈저리게 하는중이다.

 

지구는 우주를 유영하는 유인우주선이다. 살아가야하는 한정된 공간에 마음대로 쓰레기를 버리고 오염물질을 배출하며 살기엔, 우리에게 지구밖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다. 미래 세대가 우리를 돌이켜 본다면 이 처참한 선택과 풍경에 기가 막힐 것이다. 물론 미래세대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가끔 계기교육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만나면, 이 친구들이 지구의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달한 2040년에 고작 서른 남짓이라는 사실에 큰 고통을 느낀다. 당장 나는 수명대로 살 수 있을까? 환경오염으로 죽게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전재산은 200만원 남짓(대출을 끼면 좀 더 있는 편)인 청년으로 이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가진 게 너무 많다는 사실에 괴롭다. 살아있는 시간 동안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없는 닭과 돼지, 소 기타 여러 생명들의 앞에서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이 너무 부끄럽다. 이 모든 재화가 내가 이고 가야하는 삶의 무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채식을 하는가. 특별히 내가 교양 넘치거나 생활에 여유가 있거나 더 배웠답시고 하는 짓거리는 절대 아니다. 넘치도록 소모하고 낭비하는 오늘날 인간문화에서 최소한 나의 빼어난 활약으로 사태가 악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작은 마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며 오늘도 책을 덮는다.